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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부정과 자기 성찰로서의 창원조각비엔날레, 그 탈피를 상상하며

김재환 시각예술비평가 날짜 : 2020.10.05 조회수 : 1,780


자기 부정과 자기 성찰로서의 창원조각비엔날레, 그 탈피를 상상하며

 

김재환 (시각예술비평가)

1. 하나의 입장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경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로서 창원조각비엔날레에 참여하고 있는 최정화 작가를 매개한 관계자이며, 비평웹진의 필진 구성에 개입한 협력자다. 상황이 이러하니 창원조각비엔날레에 대해 비평적 시선을 견지하고 객관성을 유지하며 글을 쓰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 글을 포기할까. 몇 번이고 마음먹었지만 이런 상황에 의해 비평 행위를 멈추는 것 또한 온당한 일은 아니기에 마지막까지 키보드를 붙잡고 있다. 이 갈등은 아마 글이 끝나는 순간까지 반복되겠지만 자기 부정자기 성찰을 키워드로 내건 창원조각비엔날레이기에 용기를 내어 진행해 본다.

입장이 이러하다 보니 불행히도 내부자의 시선으로 애정 어리게 볼 수 있는 부분들은 애써 외면하고 비판적 시선으로 전시에 접근해보고자 하는 태도가 강해진다. 더군다나 나는 국내외 비엔날레의 우후죽순 개최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는 터라 기본적으로 비엔날레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할 수 없는 선입견이 있다. 그래서 여기 서술되는 글은 창원조각비엔날레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분석이 아니며 여러 사정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어떤 한 사람의 주관적인 글임을 미리 밝혀둔다.

 

2. ‘비조각(Non-Sculpture)’과 비엔날레, 그 어색함에 관하여

2020년 창원조각비엔날레 시민 강좌 9회 정준모(전시기획자)비엔날레의 흐름과 조각에는 비엔날레의 현실을 꼬집는 문구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비엔날레의 목적은 동시대의 사회적 현상들을 현대미술을 통해 성찰하며 대안을 제시하고 담론을 생성하는 것이다. , 문화 예술적 담론 생산으로 새로운 예술적 가치 추구를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는 개최 도시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는 수단으로 본말이 전도된 경우도 허다하다.” 이 문구 중 유심히 봐야 할 문장은 앞부분인데 비엔날레의 목적을 동시대의 사회적 현상을 현대미술을 통해 성찰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담론을 생성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부분이다. 물론 이러한 규정이 모든 비엔날레에 적용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현대미술의 현장을 고려한다면 주요 비엔날레가 추구하고 있는 방향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즉 비엔날레의 주제가 미술계의 문제이든 사회 전반의 그것이든 어떤 상황에 대한 분석과 이해 그리고 담론 형성이라는 흐름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엔날레가 이러한 흐름을 가지게 된 것은 현대미술의 장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는 전설이 된 하랄드 제만이 기획한 태도가 형식이 될 때 When attitudes become Form1968년 스위스 베른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전시는 비물질적이고 언어적인 작업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전시로 작가들의 생각과 태도 그리고 개념을 시각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당시로서는 너무나 파격적이어서 전시 장소였던 베른의 시민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기도 했으나, 지금은 모더니즘의 종언을 고한 전시로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 현대미술은 매체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재료나 소재가 아닌 사회적 화두, 이에 대한 작가 또는 큐레이터의 생각이 담론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비엔날레를 비롯한 대규모 국제 전시의 경우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주제를 선정하고 특정 이슈를 부각하는 방식으로 전시의 성격이 급격히 변하게 되었다. 즉 작가의 작업 그리고 이를 보여주는 전시에서 작품의 재료적 속성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고 작가의 생각 또는 전시 개념이 더 중요한 어떤 것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것은 형식이나 재료를 고민하고 이를 토대로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열어 매체의 순수성을 지향했던 모더니즘과 종언을 고하는 강력한 방식으로 지금까지도 유효한 전략이다.

이렇듯 현대미술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이번 창원조각비엔날레의 주제인 비조각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비조각의 이론적 근거로 내세운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쓴 확장된 장에서의 조각(Sculpture in the Expanded Field)(1979)과 이승택의 내 비조각의 근원(1980)의 글을 생각하면, 이러한 의문은 더욱 증폭된다. 40년 전 모더니즘을 극복하기 위해 내세운 개념을 왜 2020년인 지금 소환한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 역시 1990년대부터는 조각이라는 특정 장르가 아닌 매체 전반에 대한 연구로 관심을 선회한 걸 보면 비조각은 이제 하나의 유의미한 역사적 행위로 기록되어야 할 미술사적 대상뿐이다. 이것은 뮤지엄의 역할을 수행하는 미술관에서는 충분히 의미 있는 전시 주제이나, 동시대 미술의 현장을 조망하고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비엔날레의 주제로서는 상당히 어색한 키워드다.

내부자의 시선을 살짝 드러내자면, 이런 사실을 전시감독이 몰랐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추측해보면 비조각을 비엔날레의 주제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창원조각비엔날레의 과거를 살펴보고 내린 결론이 아닐까 싶다. 사실 창원조각비엔날레는 2년에 한 번 개최된다는 그 사전적 의미로서의 비엔날레 말고는 동시대 미술계에서 움직이는 비엔날레의 속성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조각심포지엄에 가깝다. 사정이 이러하니 창원이라는 도시가 획득하고 있는 조각에 대한 모더니즘적 태도를 조금이라도 흔들어 보려고 한 노력이라고 상상해볼 수는 있겠다.

 

3. 장소, 맥락, 그리고 비조각

앞서 언급한 전시 개념에 대한 부정적 판단은 전시의 시각적 결과가 뛰어날 경우 일정 정도 상쇄될 수 있다. 동시대 시각예술이 철학과 개념의 영역으로 이행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미술은 시각예술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구축된 전시의 시각성은 그 자체로 전시를 빛나게 한다. 그런데 이것 또한 아무 장소에서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장소의 맥락과 성격이 작업의 결과물과 맞아떨어져야 실현될 수 있다.

창원조각비엔날레는 이 부분에서 애초 매우 취약한 인프라를 가지고 있다. 본전시 1. ‘비조각으로부터가 열리는 야외는 용지공원(포정사)으로 한정되어 있어 작품의 설치 장소와 작품의 상호 관계는 드러나지 않고 작품들끼리의 상호 관계만이 부각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용지공원이라는 장소는 일종의 캔버스로서만 작동해 공원의 장소성이 표백되는 느낌이다. 이는 한정된 장소에 많은 작품을 모아 둘 경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결과다. 용지공원 내에 설치된 15점의 작품은 각자의 이야기와 유의미한 개념을 품고 있지만,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로 나열되어 있어 그 의미가 반감되고 있다.

예컨대 스트라이듬 반데르 메아브의 <지구매듭 자연적으로 응축된 지구, 발견된 오브제>는 자연에 존재하는 돌(물론 기계의 개입으로 조각난 바위 같은 돌)을 공원 한 켠에 가져다 놓은 작품이다. 자연이면서도 인공이고 동시에 예술이 되는 돌은 다른 예술 작품이 없는 한적한 어느 곳에서 발견되어야 그 가치가 살아나는데 안타깝게도 주변에 인공적인 설치물이 너무 많아 자연의 느낌은 사라지고 선택된 오브제만이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창원이라는 도시 전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더 다양한 장소로 확장해 작품과 장소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고려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다.

이러한 아쉬움은 본전시 2. ‘비조각으로에서도 감출 수가 없다. 성산아트홀 1, 2층에서 선보이는 본전시는 다양한 형태의 설치미술과 해체적 조각 그리고 참여형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온라인에서 소개되는 그 구성의 면모만 보면 기존 창원조각비엔날레의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 훌륭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다양한 설치 작업이 천고가 낮은 성산아트홀에 빼곡히 들어서는 순간 발생한다. 회화 작품 전시에 특화된 전시 공간에 거대한 조형물이 들어오면서 가볍고 유연한 느낌은 사라지고 꽉 막히고 답답한 느낌이 전시실을 가득 채운다. 사실 비조각이라는 개념 속에는 화이트 큐브의 표백화된 공간을 탈피하고 전시 공간의 장소성과 맥락이 작품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 상황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비조각으로라는 타이틀을 단 전시라면, 전시 작품의 가치를 오롯이 드러내기 위해서 전시되는 장소와의 관계를 꼼꼼하게 따졌어야 한다. 요컨대 성산아트홀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작품 수로 제한하고 개별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성산아트홀이라는 공간 자체에 있다. 이 공간은 현대미술 관련 기획전을 하기에는 좋은 환경이 아니다. 향후 성산아트홀을 창원조각비엔날레의 메인 공간으로 지속 운영할 계획이라면 성산아트홀 공간 자체를 현대미술 전시가 가능하도록 리노베이션 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전시 자체에 대한 이야기기가 아니므로 이 정도에서 끝.

 

4. 변화의 실마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0창원조각비엔날레는 변화 가능성의 실마리를 스스로 제시하고 있다. ‘비조각이라는 개념이 역사적 유산이기는 하지만 조각의 틀을 유지하고 있는 창원조각비엔날레로서는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비조각이후 조각비엔날레가 무엇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확장된 조각의 영역에 들어올 수 있음이 명확해졌다. 특히 특별전 2. ‘아시아 청년 미디어 조각을 통해 영상을 활용한 공간 점유 행위가 조각적 설치의 어떤 것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는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는 벌써 자연스러운 것으로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어쨌든 지난 10년의 창원조각비엔날레가 조각이라는 틀 속에서 조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을 해왔고 이번 비엔날레가 자기 부정과 자기 성찰이라는 카드는 내걸고 이 과정에 마침표를 찍으려 노력했다는 사실은 인정할 부분이다. 이러한 성찰을 통해 창원조각비엔날레가 전통조각의 개념에서 완전히 탈피하고 말 그대로 비엔날레의 각축장에서 당당한 플레이어로서 자리 잡기를 기대해본다. . 물론 나는 비엔날레라는 유희의 장을 딱히 반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링 위에 올라선 창원조각비엔날레가 보고 싶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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